2010년 3월 19일 금요일

말년에 대한 단상

http://blog.naver.com/yoneui/100000473176 ## 이 사진은 성도 무후사의 정문입니다 (아~~ 시퐁. 시퐁.. 가고 싶다 -.-)1. 주절거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마지막을 보라고 일렀다. 그 죽음에의 마지막을 보자면 그 사람의 인품과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하였으니 그 마지막의 조각들을 들추어 곰씹어보면 그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생각할 여유가 있지 않을까 말이다. 따라서 삼국지를 살아갔던 인물들의 마지막을 한번 들춰내보고자 한다. 2. 끝까지 오만한 자 - 운장 관우 오만방자함이 그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왜 조조에게는 항복을 하였으면서 왜 손권에게는 항복을 하지 못하였을까? 조조에게서 느꼈던 감정이 손권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은가. 어찌 호랑이 자식을 개새끼에게 시집 보낼 수 있는가? 일개 ‘무장’에 불과한 관우가 감히 일국의 군주인 ‘손권’에게 그렇게 일갈성토를 하고 손권 앞에 붙들려가서도 ‘고래고래’ 그 기개를 꺾지 않았으니 그 오만방자함이 극을 찌르는 모습은 어찌보면 ‘당당함’이 아니라 ‘허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오직 나뿐인가? 조조에게는 말도 안되는 세가지 약속을 한 이가 왜 손권에게서는 그러한지? 차라리 살아남아 ‘형주 재탈환전’으로 그 치욕을 씻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허세의 과장성시. 관우를 보면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당당한 기개로 보기에는 어쩐지 ‘역겨움’이 묻어나는 자. 관우의 죽음에서마저도 그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본디 나그네는 관우의 등장에서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왠간해서는 여전히 나그네에게서 사라지지 앟고 있다. 3. 물망초의 미덕 - 봉효 곽가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다. 봉효야 말로 ‘조조의 물망초’로서의 삶을 아주 충실하게 그것도 조조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 인물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조가 ‘봉효와 전위’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전위’보다는 ‘봉효’의 죽음에 더 애타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창천항로에서 봉효가 유언처럼 남긴 ‘원가의 패망이 눈에 보여 아쉬울 것이 없다’라고 했으니 그의 죽음에까지 ‘조조’향한 ‘해바라기’와 조조의 ‘물망초’로서의 삶에 안타까울 것이 없는 하나의 ‘미덕’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임이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나그네의 봉효 찬미가 또 시작되었군’이라 할 것이 눈에 선하므로 마칠까 한다. 꽤 짧아서 아쉽긴 하다만........ 4.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의 짙은 그림자 - 맹기 마초 마초가 언제 죽었는지 아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없을것이라고 나그네가 단정지어도 하등의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라 믿어의심치 않을만큼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그의 죽음은 병사다. 그의 촉으로의 투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한 시대를 풍만할 자질을 지닌 장수’로서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어졌다. 그러나 그는 촉으로 오고나서부터는 거의 그 모습이 보여지지 않고 있다. 과연 왜 그런것인가? 그것은 분명 나모씨의 ‘필력’에 의한 장난도 그 한몫을 하겠지만 ‘서량의 마초맹기’로서 그 이름을 드날린데는 분명 ‘마원의 후손’이라는 것과 ‘금마초’라 불리운 북방 오랑캐와의 전적에서 그 화려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초는 촉으로 잘 못 왔다. 그는 ‘북방 오랑캐’를 대하는 전략적 방법을 알고 그네들을 다스렸을터이지만 남방 오랑캐를 다스리는 전략적 방법은 모르고 있었다. ‘촉한’이 굳이 ‘북방 오랑캐’와 맞붙어 싸울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승보다 패가 많은 장수. 촉한으로 와서는 ‘오호대장군’이라는 명성으로서 우리에게 각인은 되고 있지만 그의 촉한으로의 투항은 ‘커튼 내려진 연극무대’라고 볼 수 밖에. 5. 원통의 원망이라 - 공근 주유 & 사원 방통 <* 이것은 봉추암에 쓰여있는 ‘공명을 시기하여 연환계를 바치다’라는 문구에 전적으로 의거함 > 하늘은 왜 주유를 낳으시고 공명을 낳으셨나요라고 통곡한 이가 주유만은 아니리라. 하늘은 왜 방통을 낳으시고 공명을 낳으셨나요라고 또 통곡한 방통도 같은 맥락이다. 이네 둘의 죽음은 ‘공명’이라는 인간에 대한 ‘한맺힌 원한의 울부짖음’으로 그 마무리를 지을지니 인간의 시기심에 의한 죽음은 확실히 ‘별볼일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한’을 가졌으면 상대를 고꾸라뜨려야지 그도 저도 못하여 ‘한’으로 쌓여서 자멸하는 것은 기실 별볼일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 한의 원통함이 성공하면 ‘나쁜 천하의 악인’으로 묘사는 될지언정 그 스스로의 ‘한 서림’은 풀릴 수 있지 않겠는가. 원통과 원망을 가슴에 품고서는 다른 무슨 어떤 일을 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 ‘한 서림’을 가지고 자멸한 이가 있으니 왕랑이로구나. ‘공명’ 이라는 한 개인에 의해 ‘자멸’한 인간이 왜 이리 많은 것이냐? 한도 못풀면서 왜 한을 지니는가. 뭐, 한을 품어서 ‘오뉴월에 서릿발’이라도 내리게 할 심산인게냐? 6. 기력이 허해가지고설랑은 - 백부 손책과 자명 여몽 ‘귀신’을 본다는 것은 ‘기력이 허해서 그러하다’라고 한의학에서는 이야기하는바 그렇다면 그 귀신에 휘둘려 쌓여서 죽음을 당한 ‘손책’과 ‘여몽’은 그 외모적 풍채에서 나타나는 ‘기세당당’함은 거짓일 수 있다라는 것이다. 보약이라도 지어먹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전장터에서 죽인 사병들만해도 그네들에게 몇이겠는가? 그런데 그 죽인 인물에 의해 ‘혼령’을 보고서 겔겔 골골 거리다가 그 생을 달리하였으니 ‘몸 관리’를 못한 인물이지 않겠는가. 관우와 장비가 ‘혼령’을 보았다라는 이야기도 없으며, 조조는 ‘화타’의 혼백에 ‘혼쭐’나기는 했지만 그 혼백에 의해 죽지는 않았으나 오직 ‘손책’과 ‘여몽’은 그 '혼령‘에 혼비백산하다가 죽어갔으니 어이할꼬. 겉으로만 ’당당‘했지 그 내면적으로는 ’기력이 허한‘ 인물이 아니던가 말이다. 손견을 죽인 ‘유표’도 손견의 혼령에 시달렸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유비’를 죽인 ‘육손’도 유비의 혼령에 시달렸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장비를 죽인 ‘범강’과 ‘장달’ 또한 장비의 혼령에 시달렸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몸 관리를 하지 못하여 기력이 쇠한 인물이라는. 양두구육! 겉으로 기세등등하면 뭐하는가 속으로 옹골차야 ‘진국’이라고 말을 하는 법이다. 7. 잡설을 끝내며..... 죽음! 그 인간의 살아온 생애를 반추해 보고자 한다면 ‘결혼식’장에 ‘몇사람’이 왔는가를 보지 말고 ‘장례식’장에 ‘몇사람’이 왔는가를 보라고 한 속담도 있지 아니한가. ‘정승 장례식장에는 안 가지만 정승 말 죽은 곳에는 간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가 . 태그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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